작년 9월 작성한 지난 글에서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게 내 분야를 소개하겠다고 하였는데, 숨 가쁘게 지나간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우선순위가 쭉쭉 밀려버렸다. 다행히 이제는 조금 안정을 되찾은 것 같으니 간간히 써보도록 노력해야지. 우선 오늘은 그동안의 근황을 좀 정리해보고자 한다.
작년 9월에서 올해 2월까지는 한 치 거리낌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몸도 마음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너무 일이 많았어서 무엇부터 말해야 될 지도 감이 잘 안 잡히지만 하나씩 말해보면… 처음 들어가서 자리도 없어 실험실에 옹기종기 노트북 들고 일하다가, 앉을 자리를 받았다. 두 자리는 301동에, 네 자리는 반공연(104-1동)에 받게 되었는데, 항상 모여있던 우리 입장에서는 많이 아쉬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 나는 301동에 있는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이 자리가 약간 셋방살이 같은 느낌이었다(사실 지금도 좀 그렇다). 내가 있는 방을 쓰는 대학원생들은 모두 같은 연구실이었는데, 그 곳에 우리가 두 자리만 들어가는 형국이니 아무래도 눈치가 참 많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실 그 분들이 우리와 같은 필드의 분들이시고, 논문으로도 이름을 많이 접해서 내적 친밀감이 높았었다. 그래서 처음에 좀 친해지려고 커피도 사고 인사도 하고 여러 가지 해보았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별로 우리와 친해지실 생각들이 없어 보이셨다. 그러다 보니 나 스스로 더욱 어색해지더라. 그래서 눈치나 조금 보면서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중에 굉장히 좋은 분이 오셨다. 회사에서 잠깐 인턴하시다가 복귀하시는 거였는데, 놀랍게도 먼저 인사를 해주시더라. 연구실에서 구성원들끼리 밥 먹을 때도 양해를 구하시고, 뭐 사오셨을 때는 같이 나눠주시기도 하셨다. 그 전까지만 해도 사실상 없는 사람 취급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오시고 이야기도 좀 하게 되고 눈치도 좀 덜 보게 된 것 같다. 점차 시간이 지나며 이젠 옆 자리 분하고도 친해지게 되고 수업 같이 듣게 된 분하고도 부담 없게 되고, 새로 오신 분도 잘해주셔서 참 감사한 마음이다. 나도 보답을 해드려야 하는데 본가 들렀을 때 호두과자라도 사가야겠다. 여하간 첫 몇 달 간은 자리 적응에도 마음 고생이 제법 많았었다.
그와 동시에 수업과 연구, 방장 업무를 병행했다. 공식적으로 9월부터 방장 (..사실 3월부터 했었는데 말이지..)이 되고 과제 예산 및 인력 분배 같은 업무와 더불어 신입 공부 봐주기 등 다양한 잡무를 하게 되었고, 수업도 여럿 듣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귀찮은 것도 당연히 엄청 많았지만 재밌는 것도 있었다. 새로 들어온 친구가 공부도 잘하고 다재다능하여서 공부한 것을 발표하는 시간이 굉장히 흥미로웠고, 수업에서 현직 실무자분들이 알려주시는 내용도 재밌게 들었던 것 같다. 연구 자체도 지난 연구와 다르게 술술 풀려서 하는 것이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럼에도 여러 일을 처리하다 보니 시간도 많이 쏟고 피곤하게 지냈었는데… 사실 이정도는 자리를 옮기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적응 문제라고 생각했다. 12월 DHIP2024를 주최하기 전까지..
12월에 일본과 한국의 홀로그램을 연구하시는 연구자 분들끼리 모이는 소규모 국제학회 DHIP2024를 우리가 주최하게 되었다. 반공연 건물에서 하게 되었는데, 주최 전 교수님이 큰 틀을 잘 잡아주셨음에도..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속속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 우리를 가장 괴롭힌 것은 카드 리더기였다. 갑작스럽지만 DHIP 2024는 한국광학회의 지원을 받아 주최되는 학회인데, 그에 따라 한국광학회의 카드 리더기를 사용해서 등록비를 현장결제하는 식으로 진행을 해야 했다. 근데 카드 리더기가 오래된 버전이라 그런지? 무엇이 원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건물 입구 근처에 있는 관리실의 랜선을 꽂았더니 정상 동작을 하지 않았다. 이 것을 나는 학회 시작 이틀 전에 알게 되었는데, 그 후 여러가지 방안을 떠올려 시도를 해보았지만 결국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다. 반공연 행정실에 연결하는 것. 문제는 반공연 행정실은 건물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방문하시는 분들을 그 곳까지 다 인도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학회 당일에 우리는 우선 참석자 명찰 출력하고 참석자 명부 작성 받은 다음, 등록비 결제는 나중에 우리가 찾아가서 카드 받아서 해서 가져다주기로 했다. 먼저 첫 쉬는 시간에 초청 연사부터 결제해드리기로 하고, 우리가 각각 초청연사 3분씩을 담당해서 카드를 받고, 행정실가서 결제하고 다시 가져다 드리는 일을 했다. 그 후에는 쉬는 시간마다 결제 하실 분 명단을 PPT로 만들어서 배분해서 결제해드릴 수 있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내 체감으로는 정말 난장판이 아닐 수 없었다. 근데 놀랍게도 일본 분들 입장에서는 직접 와서 카드를 받아서, 결제해서 영수증까지 가져다 주는 것이 굉장히 좋게 보이셨나 보다. 교수님께 호평을 많이 하셨다고.. 참 세상 보는 눈이 이렇게 다르다. 그 외에도 여러 자잘한 사건들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임기응변으로 어떻게 다 잘 처리할 수 있었다. 이 땐 다시 되돌아보아도 어떻게 해냈나 싶다. 역시 사람은 닥치면 다 하는구나 , 깨달음을 얻었다.
DHIP 주최가 마무리되니, Siggraph 2025의 제출 마감일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당시 나는 내 연구를 Siggraph에 제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는데, 앞선 일들을 비롯해 시험이나 인하대 to 서울대 과제 이전 관련한 행정 처리(이게 또 진짜 일 꼬인 게 많았다..) 같은 것들 해치우다 보니 두 달이 그냥 삭제되었다. 그래도 1월 되어서 행정 처리 및 예산 회의 등 잡무들에 치이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실험 결과 및 논문 작성을 마무리해서 Journal-only track에 제출을 할 수 있었다. 실험 결과 자체는 그래도 좋게 나와서 약간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후 나온 rebuttal에서 리뷰어 2명은 accept을, 2명은 boarderline reject을 주었다. 듣기로 Siggraph는 CVPR 과는 달리 1명의 리뷰어만 반대를 강하게 해도 Reject을 준다고 해서 걱정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종 결과에서 Reject을 받았다. 꼭 가보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었다. 그래서 이걸 어디다 낼까 하다가 교수님과 논의 끝에 Light: Science & Application에 내보기로 하였다. 해당 저널이 데스크리젝이 정말 많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포맷 바꾼 노력이 무색하게 제출한 지 하루 만에 데스크리젝을 받았다. 머리로는, “그래 빨리 받으니 차라리 좋다 다른 곳에 내자” 생각을 했는데, 가슴에서는 많이 서운하더라. 높은 저널에 내고 떨어지는 과정이 지난 연구에도 있었지만 이번엔 연달아 들이닥치니 좀 더 마음이 헛헛했던 것 같다. 그 후 원래 내기로 했던 Laser & Photonics Reviews에 제출을 하고, 좋은 리뷰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공교롭게도 내 생일인 6월 24일에 accept 메일을 받게 되었다. 저널에서 나에게 생일 선물을 주는 날이 다 오네 싶었다.
이제는 다사다난했던 1년 차가 끝이 나고 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는 장학금도 받고 새로운 경험도 많이 하고, 좋고 나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는 심적으로 안정된 기분을 느낀다(어쩌면 곧 방장이 끝나서 일지도?). 앞으로의 3년 동안 열심히 또 연구하고, 자기 계발해서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될 수 있길 바라며,
끝
